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문단 편집) == 평가 == || [[파일:Franz Conrad von Hötzendorf(portrait photography).jpg|width=600]] || >'''"콘라트는 [[동맹국]] 진영에서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 대전|세계 대전 전체 인물들을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 >[[앙리 구로]] 콘라트와 같이 복무했던 전 동료 장성들에게 있어서 콘라트는 천재였다.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그의 추종자들은 콘라트를 [[사부아 공자 외젠|외젠 드 사부아카리냥 공자]]에 비견된다고 자부하였다. 그의 공격적인 전투 교리는 군부 내에서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종전 후에도 세간에서는 그를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제국에 헌신하여 적과 맞선 훌륭한 영웅이라고 인식했을 정도였다. 다만 협조성이 부족했던지라 남들을 믿지 못했던 콘라트는 제국군의 모든 작전 계획들을 본인의 검토 및 승인하에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때문에 독일 제국군과의 합동작전에서도 다소 마찰을 일으켰다.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의 결과로 복고적, 반자유주의적 인사였던 콘라트는 100년전 인물이었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수상이 이미 내세웠던 것과 같은 길을 걸었다. 콘라트의 관심은 오직 [[오스트리아]]-[[보헤미아]], [[헝가리]], [[남슬라브]] 이 세개의 세력이 황실에 충성하면서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며 제국을 번성시키고자 하는 것 뿐이었다. 장군참모장으로서 그는 제국을 부흥시키는 열쇠이자 내부 분열의 치유책으로서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옹호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불필요한 방해물이라 판단하였고, 철저한 보수 정치에 의한 질서 유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다만 콘라트는 동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셔널리즘|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민족들의 의지에 반하여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병합하는 것이 제국을 오히려 약화시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의 완전한 오스트리아 중심적인 사고로 인해, 콘라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에게 반감을 사고 말았다. 콘라트가 짜놓은 전쟁 계획은 종종 적의 힘을 과소평가하여 실패를 거둔 바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세르비아군은 콘라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투에 나선 반면, 제국군은 무분별하게 패주할 뿐이었다. 추가로 이탈리아 전선에 대한 그의 공세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고,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이러한 실수의 결과는 전쟁 첫 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그의 군대는 독일 제국군의 막대한 지원을 통한 전투에서만 성공을 달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독일 제국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점차 전쟁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로 낳았다.[* 사실 이것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서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육군 원수로 재임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대부분의 주요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특히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대패로 인해 제국은 전투 불능 상황에 빠지고 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연달은 패배로 궤멸되어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대국적인 식견 자체는 인정을 받았다. 무척 뛰어난 전략적 식견에 비해서 실제 공적은 매우 뒤떨어졌던 셈인데, 사실 이는 약체화되고 불안 요소가 산재했던 제국군 전체의 상황 때문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짜놓은 공세 계획 등을 독일에게 넘길 뿐이었다. 비아냥받는 콘라트의 대공세 계획은 무의미하지도 않았던 것이, 팔켄하인의 소모전략의 경우도 결국 나중가서야 팔켄하인이 스스로의 실패를 인정하고 뒤늦게 대공세에 나서게 되었을 정도였다. 그의 진정한 문제라고 한다면, 뛰어난 군사전략적 식견과는 별개로 대전략적 식견이 뒤떨어졌다는 점이었다. [[1914년]]과 [[1918년]] 사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의해 동원된 800만 명의 군인들은 종전했을때 당시 150만 명 미만의 사망자와 190만 명 이상의 부상자와 120만 명의 전쟁 포로라는 피해를 입었으나 콘라트는 그러한 재앙에 대한 책임을 결코 지지 않았다. [[1918년]] [[11월]]의 혼란 속에서, 제국의 붕괴를 이원론과 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의 탓으로 돌렸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함께 수년 전에 옹호했던 "삼중제국" 개념을 제국이 진작 충실했다면, 크로아티아가 지배하는 남슬라브를 만들기 위해 제국이 더 세분화되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느꼈다. 또한 콘라트는 개전 초반 신속한 공세가 좌절된 이유를 [[독일 제국]]의 군사적인 지원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콘라트는 수년간의 정치적 다툼으로 [[양면전쟁|이중전선]]에 대해 준비하지 못하도록 군을 방치하고 지원을 부족하게 만든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현실도피에만 급급했고, 종전 후에도 자신은 어떠한 정치적 결정도 내리지 않은 "그냥 군사 전문가"였을 뿐이라면서 제국 패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의 염세적인 사회진화론적 사상에 중점을 두자면, 이러한 결과는 국가의 발전에 있어서 더 강한 국가가 싸움 끝에 투쟁에서 이긴것뿐이라며, 승패 여부는 상관없이 개인의 책임이 당연히 없는 결과로 여겼다. 그는 어떤 부모들 못지않게 고통을 겪었다. 콘라트의 장남과 삼남은 전쟁통에 전사하였고, 막내는 팔에 부상을 입었다. 그들의 운명에 관해서는 콘라트도 걱정하였지만, 4명의 자기 자식들은 모두 현역으로 복무할 의무가 있다고 언급하는것으로 전쟁에 대한 열정을 몸소 보여줬다. 어쨌든 동시대 제국군 군부의 주요 장성들 중 콘라트만이 현대 총력전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 끝까지 중임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그를 대단히 신용하여 중임에 기여한 바가 큰 것도 있다.] 콘라트는 전술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과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무척 뛰어났고, 이를 포함하여 군대의 기동성 및 수송 및 항공전의 기계화는 그를 군사 분야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이렇듯 콘라트의 명성은 국내외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령 [[독일 제국군]]의 육군 장군참모장이자 [[바이마르 공화국]]의 2대 대통령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콘라트에 대해서 대담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제국군 자체가 약점이어서 제국군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진 슬픈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영국]]의 유명 [[군사학|군사 역사학자]]인 [[https://en.wikipedia.org/wiki/Cyril_Falls|시릴 펄스]](Cyril Falls)[* 생몰년도: 1888년 ~ 1971년]에게도 칭찬을 받았다. [[1959년]]에 출간한 The Great War에 따르면 콘라트는 분명 전쟁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략가이며, 독일 제국군이 성공을 거둔 동부전선 공세 작전의 대부분은 콘라트의 작전에 근거했다면서 그의 계획은 훌륭하게 구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소련]]의 [[원수(계급)|원수]]이자 이론가인 [[보리스 샤포시니코프]]는 콘라트 사후 2년이 지나 [[1927년]]에 출간한 군사 교리 서적 모지아미(Мозг армии)를 통해 콘라트를 정통적인 장군이며 참모 장교로서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봤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민족이나 출신에 대한 차별없이 인재를 평등하게 기용했던 그의 사상을 [[마르크스주의]]와 빗대면서 군인으로서의 정치가 유능했다는 평을 남겼다. 샤포시니코프가 동부전선에서 장교로 복무하였을 적, 적국의 지휘관이 콘라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전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샤포시니코프는 콘라트의 전략적 전망과 전장 전술에 대해 무비판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콘라트가 "집단적" 참모 활동의 가장 좋은 예라고 칭송했으며, 개인적인 자질을 평할 때도 콘라트를 그의 기질과 [[일 중독|워커홀릭]]적인 모습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에 비견하여 독립적, 정력적이며 계획적, 대담하고 강인한 성격을 가졌다며 칭찬을 하였다. [[영국]]의 군인이자 군사학자인 [[리델 하트]] 역시 콘라트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의 열의를 능가하지 못할 정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총사령관 콘라트는 유럽에서 제일 전쟁에 열성적이었다."라는 평을 남겼다. 현대에 그를 연구한 인물로는 미국의 역사가 [[https://en.wikipedia.org/wiki/Samuel_R._Williamson_Jr.|새뮤얼 R. 윌리엄슨]](Samuel R. Williamson)[* 생몰년도: 1935년 ~ ]등이 있으며 콘라트를 아마도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 모든 유럽의 군사 지도자들 중 가장 교활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반면,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오스트로마르크시즘(Austromarxism)[* 혁명적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절충을 주장한 사상.]의 창시자 [[https://en.wikipedia.org/wiki/Otto_Bauer|오토 바우어]](Otto Bauer)[* 생몰년도: 1881년 ~ 1938년]는 콘라트를 단순한 [[전쟁광]]으로 규정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전쟁 발발의 주범으로 고려되는 유럽 전역의 5~6명을 꼽는다면 그 중 한 명은 확실히 콘라트 원수일 것이다." >---- >[[1925년]] [[8월 25일]], 콘라트의 [[장례식]]에서 하지만 이러한 바우어의 논평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콘라트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당시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은 그의 비판에 동의하지 않았다. 독일의 [[군사학|군사학자]] [[https://en.wikipedia.org/wiki/Gunther_E._Rothenberg|군터 에리히 로텐베르크]](Gunther Erich Rothenberg)[* 생몰년도: 1923년 ~ 2004년]는 앞서 서술했듯 지형과 기후를 무시하고 보급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은 점, [[기관총]]과 [[야포]]의 잠재력을 과소평가, 그리고 국가체급만으로 전력을 확인하는 오판으로 기껏 짜놓은 전략에 자국 역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었다고 그를 비판하였다. [[한스 폰 젝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대한 맹렬한 평가를 발표했는데 젝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붕괴에 대한 콘라트의 책임을 정확히 파악했다. 제국군의 군사와 장비는 일반적으로 좋은 수준이였지만, "비이성적인" 가차없는 공격은 전쟁 초기에 일찍 정예병력을 날려버렸고, 전투 훈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예비 병력을 전선에 급히 투입해야 했다. 그리고 예비역 장교들의 리더십이 쓸데없이 너무 "체계적"이였으며 하급 장교들에게는 너무 적은 주도권을 보여줬다는 점을 들어서 콘라트를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콘라트가 일찍이 제국군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고, 스스로 군대를 지휘할 계획을 세운 황제밑에서 복무하기에도 기질적으로 적합하지 못했다는 사실 외에도, 콘라트가 장군참모장에서 해임된 가장 큰 이유는 평화를 추구했던 카를 1세에게 전쟁이 좋든 나쁘든 계속 지속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당대 지식인들도 콘라트를 조롱하였는데, [[https://en.wikipedia.org/wiki/Karl_Kraus_(writer)|카를 크라우스]](Karl Kraus)같은 경우, 콘라트를 전형적인 장군 캐릭터로 표현하였다. 이런 면모 때문에 후대에는 [[조괄|이론상으로는 위대한 전략가였지만 실제 전장에선 완벽한 실패자였던 탁상위 명장의 전형]]으로 평가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